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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marck

19세기 독일과 비스마르크(Otto Leopold von Bismarck)

글 제목과 같은 단어로 gutenberg project에서 찾으면 원문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19세기 독일과 비스마르크(Otto Leopold von Bismarck)
제가 읽던 어떤 책 이야기입니다. 재미있어서 끄적여봅니다.


대충 기억을 더듬는 것이니, 잘못 읽었거나 잘못 생각한 내용, 오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19세기초 '독일'이라고 불린 지역은 성긴 연합체였습니다. 북동부의 프러시아 왕국(그러니까 King이다스리는)과 동남부의 오스트리아 제국(요건 Emperor가 다스리는)이 양 대국이고, 그 사이에 바이에른, 바바리아, 작센,하노버같은 중간쯤 되는 왕국, 그리고 그 밑에 대공들이 다스리는 공국과 자유도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 유럽에서 황제와 왕과 대공은 독립국의 군주일 경우에는 수직적 서열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완전히 무릎꿇고 충성을 맹세한 신하일때는 아니지만요. 형식적인 임명 동의를 받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스페인 왕을 세우는 데 프랑스 왕과 독일 왕의 승인이 필요했지만스페인이 프랑스나 독일의 속국은 아니었지요) 뭐, 실제로는 군사력이나 영지의 대소에 따라 알아서 기었던 모양이지만서도,표면적으로는 동석에 앉는 대표를 내보내는 사이.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은 동쪽에 러시아와 국경을 접했고, 서로는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독일은 아래로는이탈리아와 접경했고, 위로는 덴마크와 북해에 면했는데, 프러시아는 완전한 내륙국이었습니다. 비스마르크가 공국의 계승문제에 간섭해프러시아가 덴마크에게서 킬(Kiel)을 빼앗아온 뒤로 독일 해군이 생기고 식민정책이 활성화된 것 같습니다.

   당시는 나폴레옹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뒤로, 각국에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발호하던 때였습니다. 메테르니히가 복구한 구체제는19세기 중반까지 많은 도전을 받으며 금가고 있었고, 다민족으로 구성됐거나 타국을 분할해 흡수한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은제국/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피지배민족의 봉기를 억눌렀지만, 자국민들은나름의 애국적 민족주의를 고양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아직까지 프랑스어를 프랑스 전역에서 사용하도록 강제하려고 시도중이었고, 가리발디와 카부르가 있던 이탈리아가 통일되던시기였습니다. 아직까지 주권을 가진 군주의 계승권을 해석해서 영토의 주인이 바뀌는가 하면, 거주민의 문화적, 혈족 구성을 가지고국경을 재설정하려는 시도 역시 계속되던 시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통일과 함께 교황의 힘은 상당히 약화됐지만, 교황은각국의 가톨릭 정치세력과 국가산하 종교기관, 그리고 왕실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럽 각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창업하거나 성장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뒤, 승전국 러시아는 독일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고, 여전히 단일 국가로서는 유럽 최대의 인구를 갖고 있고영토도 컸던 프랑스 역시 독일에 중국질(;;)을 하려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맹주임을 당연시했고요. 이것이 계속되어1850년을 전후한 혁명시기 강대국의 내정 개입과 왕가의 문제는 프러시아왕의 정치적 입지를 대단히 약하게 만듭니다.

(시위대가 베를린을 점령했고, 왕이 외국 군대에게 구출되는 실정이었죠. 그러니 주변국들이 우습게 보았고.. 그 때 왕에게격려편지를 보낸 게 이 사람이었고, 이것이 왕에게도 힘이 됩니다. 이후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들일 때도 왕은 퇴위를 진지하게고민하던 차였고.. 선량하고 심지가 약한 왕 + 건강이 좀 약한 것 말고는 먼치킨 스탯에 프로이센 왕빠에 고집이 아주 센 재상= 수십 년을 함께 하는 찰떡궁합이 될 수 있었던 거죠)


혁명은 실패했지만 프러시아 의회(물론 보통선거를 하는 그런 의회가 아닙니다)와 왕은 충돌이 잦아서 헌법과 예산문제로 왕은위기감을 느꼈고, 결국 왕은 극우 보수주의자이자 왕당파, 독실한 신교도인 비스마르크를 불러들입니다. 비스마르크는 젊은 시절'놀았던' 사람이지만, 솔직했고 사람을 잘 사귀었으며, 프러시아왕하고는 얼마 전부터 인맥이 닿는 사이였습니다. 왕은 그가과격해서 등용하기를 꺼렸지만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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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요국 외교관을 돌다 내각의 책임자로서 발탁된 다음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합니다. 물론, 그건 왕을 위한 정부, 왕을위한 의회라는 자기 생각을 밀고 간 것이고, 그 과정은 민주적이지 않았고 우리가 TV에서 보는 여야간의 밀실협상에 속임수에시간차공격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의 신념이 '현 시국에서 국가의 제문제는 의회 토론따위로 결판날 것이 아니며, 외교와군사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내부의 잡음은 적을 수록 좋았던 것입니다. 비스마르크는 민주정을 바란 사람은 절대아니었지만, <독일 문제>, 즉, 독일인이 주인이 되는 독일을 만들기 위한 해법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를어떻게 물리치고 자신이 속한 국가(프러시아)가 주축이 되어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결국 군사력이 뒷받침되어야한다는 이야기였고, 군대 개혁은 군비 축소와 왕권 약화를 원하던 의회의 표결에 맡길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통일이란 목표는혁명의 주축이 됐던 민족주의자나 자유주의자와 같았지만 그 과정은 그렇게 달랐죠.


정치판에 뛰어든 이래, 삼십여년간 그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합니다.
그 는 국왕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졌습니다. 협상을 잘해 왕에게 영토를 가져옵니다. 유럽 정치의 중심을 파리에서 베를린으로가져왔습니다. 유럽의 모든 분쟁은 당사국 모두가 그의 중재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거의 모든 협상에서 그 자신의 운과 능력으로성공했습니다. 두 차례의 대전쟁(오스트리아는 독일을 자신을 주축으로 통일하고자 ㅎㅒㅆ고, 프랑스는 독일 라인강 서안을 분할해점령할 계획이어서 전쟁은 불가피했습니다)을 성공으로 마무리지었습니다. 정치판에 들어가기 전에는 스스로 밭갈고 농장을 경영한시골귀족 계급이었으면서 수상이 된 다음에도 두 자식을 참전시켰고, 아들들은 결정적인 전투에서 후방의 참모 장교가 아니라 일개 용기병으로서돌격했습니다. 독일이 통일된 다음, 그는 오직 황제 한 사람 아래 있으면서 국가의 모든 권력을 가졌고 사실상 나라를운영했습니다. 심지어 통일 독일 헌법도 그 자신이 기초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몇 달 휴가받아 짱박혀서 만들어갖고 나와선의회에 던져줬댑니다. '이게 독일 헌법이니까 읽어보고 통과시켜' 이렇게);;


프로이센-프랑스전쟁 결과 독일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그는 프랑스란 나라에 대해 많이 실망합니다. 엘리트가 아니라인기와 인맥으로 외교관이 되어 자신을 상대로 한 프랑스인들의 자질에 실망하고, 황제를 생포했더니 황제를 잘라버리고 항쟁하겠다는프랑스인, 그리고 비정규전을 하면서 게릴라를 소탕하면 민간인을 잡는다고 외신에 제보하는 프랑스인을, 프랑스가 타국의 영토를점령하는 건 하늘이 준 축복이고, 타국이 프랑스의 땅을 점령하면 인류의 도리에 반한다며 비난하는 프랑스인... 어쨌든 그 전쟁은독일에게는 통일을, 비스마르크에게는 왕정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해주었습니다.


독일은 통일되었지만, 옛날 사람이던 프로이센 왕은 각국의 왕에게서 왕위나 대공위를 빼앗고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총리 역시,자발적으로 연방이 된 지금 완전 통합을 강제하면 역효과가 날 것을 우려했습니다. 급진주의자들은 하나의 중앙정부아래 완전 통합을주장했지만, 그럴 경우 주권을 포기하길 원치 않는 소국 군주들과 일일이 험한 꼴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처음에는느슨하게 묶고 세대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통합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 때가 독일이 역사상 최대 영토를 얻은 시기입니다. 동으로는 아직까지 폴란드를 분할해 점령하고 있는 상태였고, 서로는알사스-로렌을 가져갔습니다. 이후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은 서부 영토는 프랑스에게 빼앗기고 동부는 폴란드는 물론 구프로이센 본국 영토까지 상당부분 소련에게 빼앗깁니다. 칸트가 살았던 쾨니히스베르크는 지금은 러시아땅입니다)

그 결과, 각국은 자치를 유지하고, 외교와 국방을 비롯한 주요 문제만 연방 정부에게 맡깁니다. 그래서, 각국은 자신의 의회도그대로 유지합니다. 그리고 통일과 더불어 국민 참정권이 생깁니다. 국민 일반의 투표로 연방의회('제국의회'라고 많이 번역됩니다.Reichstag 인가 그렇거든요. 그리고, '연방의회'라고 하면 통일 이전 프랑크푸르트에 각국이 대사를 보내 구성한 의회를'연방의회'라고 번역들 하기 때문에 겹치지 않게 하죠) 의원을 선출하게 했는데,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려는의도가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합니다. 라살과 교류가 있던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부르주아지?)보다는 일반 평민이더 왕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데, 그 자신이 시골에서 농민과 함께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작용했을 지도 모른다고 하네요.어쨌든 국민투표제는 자유주의자와 혁명을 꾀하던 이상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의 대환영을 받았고, 독일 통일의 접착제가 됩니다.통일을 전후한 시기 독일 산업이 발전하고 막대한 배상금이 유입되면서 살 만해진 다수 평민을 지지기반으로 한 정당이 변덕스런귀족이나 진보주의자를 대신해 의회에 진출하고 이들이 안정적으로 왕을 받쳐준다면! 이런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가장급진적인 정책을 시행해버렸으니 보수주의자들은 점차 그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국민참정권은 뒤에 가면 가톨릭 원리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가 차례로 정치세력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독 일 중앙정부는 독일 황제(프로이센왕)이 있고, 그 아래 황제(왕)과 총리와 연방군주의 대표가 참여하는 Council이 있고,연방 정부가 있고, 독일의 중심인 프로이센 상원과 하원이 있고, 연방의회가 있었습니다. 정부에서는 각부 장관의 힘이 미약해서외무장관 겸 총리인 비스마르크의 비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Council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절대적인 왕의 편, 그리고 왕은 어지간하면 총리에게 설득당하는 편.. 결국 그는 정부와 Council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상원은 법률에 토를 달 수만 있었고, 하원과 연방의회는 예산과 법률을 통과하거나 거부할 권한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법을 만드는건 정부, 곧 비스마르크 자신이었죠.
    이러면 내정을 상당히 쉽게 해나갔겠다 싶지만, 실은 그는 대외정책은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지만 예산과 군대, 교육 등내정에 관해서는 거의 사사건건 의회의 반대에 부딪쳐야 했고 그 때마다 묘수를 내거나 동맹할 정당을 찾아야 했습니다. 연방헌법은어쨌든 통일 이전의 각국 법보다는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됐고, 이제 제 정당은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의회 정치를 실현할 수 있을것으로 보았거든요. 한 걸음만.. 의회는 인정해도 왕이 주권을 가지는 나라를 신봉하는 총리가 이걸 허락할 리가 없었죠.(동상이몽이라고.. 의회는 영국식 대의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는데, 비스마르크는 영국식 의회정치 자체는 경멸했습니다. 대신 자기가총리가 된 다음에는 영국에선 수상이 내각을 마음대로 구성할 권한이 있는 건 부러워했죠)

그리 고, 통일을 했음에도 강력한 군대를 유지한 이면에는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독일의 외교적 상황이 있었습니다.러시아는 개평도 바랬고, 서진및 남진정책에서 무조건적인 지지를 요구했습니다. 체력좋은 프랑스는 금새 회복해 복수를 벼르고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상처에서 회복하면서 캐스팅 보트를 쥐려고 했습니다. 영국은 서유럽국의 친러시아적인 정책 일체와 신생독일이 해군을 가지는 것을 견제했습니다.. 더는 붙잡지 못할 만큼 노골적으로 반독일적이 된 러시아를 잡기를 포기한 그는 프랑스를최대한 견제하면서 삼국동맹을 이루어냅니다. (하지만 그런 섬세한 외교는 그만이 가능했던 것인지, 후에 결국 프랑스가 동맹파트너를 찾고 독일이 앞뒤로 적대국에 둘러싸인 뒷 이야기는 다들 아시는 대로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경제 개혁과 사회보험부분(ch.16-17) 아직 읽는 중이라 적지 못했습니다. 내용이야 뻔하지만, 각종인용문(본인과 관련자의 회고록, 서신 인용)이 많아 재미있는 책입니다. 저자는 동시대사람이어선지 Bismarck를 상당히호의적인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50년 뒤에도 독일인인 몸젠은 냉정하게 보았지만 영국인인 테일러는 또 호의적으로 봤다고 합니다.

ps. 이 책의 백미는, 여러 장에 빠지지 않는 외교 협상부분입니다.
명인소리를 들었던 사람인 만큼 독일인 입장에서 너무 통쾌한 일화가 많습니다.
반면 내정은, 의회를 뭐라고 생각한 거야? 하며 갸웃거리다 우리 앞시절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